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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루 하나씩

읽기에 거리가 먼 사람이 서점에 방문하는 것

우리 집엔 커다란 책장이 있었다. 그 안에 백 권이 넘는 동화전집에도 나는 좋아하는 책 몇 권만 돌려 읽는 아이였다.

펼치면 쩍쩍 소리가 날 정도로 날 것 그대로였던 다른 책들과는 달리 내가 읽는 5권 남짓한 책들은 닳고 닳아 책등만 봐도 찾아낼 수 있었다.
조금 더 자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.

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만화책에 빠져 본 걸 보고 또 보고 하도 많이 읽은 탓에 책등까지 뜯어져 책이 낱장으로 분리가 될 만큼 읽었다.

하지만 난 누군가 신화 속 등장인물에 대해 물으면 이름과 내용을 똑 부러지게 설명하지 못했다.
응, 나는 조금만 긴 문장이 나오면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지 않고 후루룩 훑어본 뒤 어림짐작으로 넘겨버리는 그런 사람이다.
음악을 들을 땐 가사가 아닌 리듬에 몸을 맡기고,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만 몇 년을 보아도 남들처럼 자막 없이 보기는 불가능하다.
문자, 글자, 언어, 말… 이런 것들에 더디고 흥미가 없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.

 

그런 내가 책을 사러 서점에 왔다.
이전에도 서점에 가는 건 좋아했다.

책 냄새와 특정 서점에서만 나는 향, 조용하지만 소란스러운 소음과 저마다 다채롭게 뽐내는 책표지들까지. 내게 서점은 오감을 자극하는 장소이다.

 

얼마 전까지는 책은 점점 사라질 물건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. 전자책의 이유도 있지만, 스마트폰 하나로 방대한 양의 정보에 접속이 가능해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고, 인스타나 개인 블로그에서 쉽게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며, 웹툰이나 인스타툰으로 만화 또한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.
하지만 그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. 책은 불필요한 것 없이 내가 선택한 정보만 접할 수 있다.

사방으로 갈래가 있어 세찬 물이 흐르는 스마트 폰과 다르게 책이라는 도구는 넓고 깊게 가득 채워진 저수지 같다.

종이의 질감을 한 겹 한 겹 그대로 느끼며 정갈하게 놓인 정보를 읽는 것은 드넓은 저수지에 구명조끼차고 누워 둥둥 떠다니며 깊고 얕은 헤엄을 치는 것 같다.
예약한 책을 받으러 갈 시간이 되었다. 책을 받아볼 생각에 설레는 기분은 참 좋은거구나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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